최석운은 오랜 시간 인물을 화면의 중심에 두었다. 거창한 주제나 숭고한 가치보다, 주변에서 스쳐지나가는 순간들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 - 그것을 재미있게 포착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한 개인전이 팬데믹으로 조용히 막을 내렸고 작가는 전남 해안의 작은 섬 임하도로 향했다. 고립된 섬에서의 시간, 그리고 우연히 찾은 이탈리아의 의 시칠리아와 피렌체의 풍경 속에서 그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풍경을 그리지 않나요?” 몇 해 전 지인이 던진 그 말이 비로소 다르게 들린 시점이었다. 최석운의 시선은 인간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풍경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에게 있어 풍경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옮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풍경 속에 여전히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곧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 풍경 안에서 인물은 다시 새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최석운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과 일상의 풍경을 특유의 해학적 시선으로 포착해왔다. 이번 전시 «FIGURE SCENES»는 오랜 시간 견지해 온 유머와 풍자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보여준다. 작가의 시선은 최근 ‘인간’을 넘어 피규어(figure)로 확장되었다. 피규어는 사람, 동물 등 실재하는 대상의 외형을 본떠 만든 ‘가짜’이자 생명력이 없는 존재다. 대상을 대담하게 생략하거나 재해석하여 해학을 극대화한 작가는 이번 전시 작품에서 인물들을 더욱 뻣뻣하고 조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여, 현대 사회 속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객관적이면서도 냉소적으로 응시한다. 캔버스 위의 인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박제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사실을 닮았으나 사실이 아닌, 그 어중간한 자리에 놓인 형태들, 조형적으로 재구성된 인물은 오히려 인간을 더 선명하게, 혹은 더 낯설게 응시하도록 이끈다.
일상에서 포착한 ‘대상’들의 배경이 되는 장면(scenes)들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세밀한 관찰에서 출발한다. 자전거를 타고 영산강과 섬진강을 여행하던 중 만난 리포터에게서 얻은 낯선 영감을 담은 <섬진강>(2024), 20년 동안 같은 길을 오가면서도 미처 눈에 담지 못했던 길가의 모란꽃을 그린 <모란꽃 밭에서>(2025)는 그 대표적인 예다. 오래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혹은 오랜 시간 보았기에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 작가는 그 순간의 ‘발견’을 화면에 옮긴다. 평범한 일상이 ‘예술적 대상’으로 치환되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어느날 불현듯 달라진 평범한 시선 하나에서 비롯된다. 잠시 해남에 머물면서, 유기견을 구조하며 벌어진 에피소드를 시각화한 <Vacances> 연작도 같은 맥락에 있다. 강아지를 데려온 순간 모두가 반기면서도 정작 돌봄의 책임은 서로 미루는 모순적인 상황, 즐거운 휴가를 연상시키는 제목 이면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책임에 대한 풍자가 깔려 있다. 작가의 시선은 유기견도,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을 탓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장면을 조용히 응시하게 만든다.
작가 내면의 고소공포증을 ‘발코니’라는 불안정한 공간으로 시각화한 작업은 현대인이 느끼는 보편적인 심리적 긴장감을 투영한다. 발코니의 인물들은 마치 피규어처럼 나열되어 정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허공에 떠 있는 공간이 자아내는 위태로움을 통해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추락할 것 같지도, 그렇다고 안전한 것 같지도 않은 그 경계 - 그것은 비단 ‘발코니’ 그림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좁은 공간에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제각각의 시선.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런 풍경 속에 익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석운은 그러한 장면들은 판단하여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들 뿐이다. 그의 그림 앞에서 관람자는 어떤 메시지를 받는 대신, 스스로 삶의 어느 한 면과 마주하게 된다. 익숙한 듯 낯선, 유머러스하면서도 씁쓸한 - 그것이 오랫동안 작가가 그려온 세계이자, 이번 전시가 건네는 이야기이다._호리아트스페이스 디렉터 고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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