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77년에 대한민국과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이하 스리랑카)이 수교를 맺은 지 40주년이 되는 해로, 이번 전시는 양국의 우호 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스리랑카는 한국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길게 유럽의 식민을 경험했습니다.
16세기 포르투갈 침략에서부터 1815년 영국에 의해 싱할라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유럽 제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스리랑카에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독립 이후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면서 한국 못지않게 어려운 근대 시기를 겪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이러한 근대 시기를 거치면서 스리랑카가 국가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하였는지 고찰하고자 합니다. 특히 스리랑카의 근대 건축 거장으로 추앙 받는 제프리 바와와 발렌타인 구나세카라의 근대 건축의 의미를 두 건축가의 사진, 드로잉, 스케치, 건축 모형, 인터뷰 및 VR 영상 등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프리 바와가 스리랑카의 풍부한 건축 전통을 중심으로 신지역주의라는 회고적 기준을 구축하였다면, 발렌타인 구나세카라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부여한 인간 평등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연 형태들의 반복과 미묘한 복제를 강조했던 근대 표현주의의 진보적인 양식을 채택하였습니다.
이 소개가 관람객들이 현재의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주도했던 두 건축가의 작품을 통해 스리랑카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제프리 바와 Geoffrey Bawa (1919–2003)
제프리 바와는 1919년에 많은 스리랑카 민족을 대표했던 유럽 혼열 자손의 가족에서 태어났다.
‘분리 통치(divide and rule)’라는 영국 식민 정책 아래, 그의 가족은 남은 스리랑카 버거인들과 함께 식민지 개척자의 보호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토지를 소유한 전문직 종사자들로 특권을 가진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러한 가계에서 바와는 1945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법정 변호사로서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콜롬보에서 짧은 실습 기간을 거친 후, 그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럽과 북미로 3년 동안의 세계 여행을 시작하였다. 실론은 당시 제국의 족쇄를 훌훌 벗어버리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처럼, 그는 정체성의 딜레마에 직면하였다. 그의 스리랑카로의 궁극적인 귀환은 유럽인으로서 유럽인보다 버거인으로서 실론에 더 가깝다고 느꼈을 거란 것을 추측하게 한다. 그의 건축은 크게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1950년대 말 영국에서 노출되었던 트로피컬 모더니즘에 의지하였고 1960년 초 즈음에 지역주의로 빠르게 옮겨갔다. 이후 국가주의의 중심지에서 성공을 발견하였던 바와의 지역주의는 비록 그가 신자유주의 영향을 증가시키는 기회를 얻지를 못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니멀리스트 국제적 유형에 의해 대체되었다.
해석주의자들이 참조하는 것처럼 신지역주의 또는 트로피컬 지역주의는 1970년대 후기에 국가의 주력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후기 그는 ‘국제 양식’과 동등한 수준으로 나아가는 기준을 채택하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들에서 신지역주의와 트로피컬 지역주의를 번갈아가며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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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구나세카라 Valentine Gunasekara (1931– )
발렌타인 구나세카라는 1931년에 식민시기 실론의 가톨릭 가족에서 태어났다.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그의 부친은 1920년대 대공황에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으며, 그가 사망한 이후 19세기 부르주와에 속했던 구나세카라 가계는 소부르주와 계급으로 갑자기 축소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나세카라는 옛 가족의 재산과 사회적 관계의 자취 속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1952년부터 1957년까지 런던의 건축 협회(AA)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맥스웰 프라이와 제인 드루가 새롭게 만들어 운영한 트로피컬 모더니즘 과정에 참여하면서 6개월을 더 체류하였다. 이후 실론으로 돌아와 그는 잘 알려진 건축 회사인 ER&B에 들어가 거기서 좋은 건축을 연습하기 위한 잠재력을 보았다. 1959년에 동료인 제프리 바와와 함께 구나세카라는 회사에서 동등한 파트너로 승진되었다.
1965년에는 록펠러 연구비를 받았으며 미국을 여행하면서 찰스 앤 레이 임스, 유로 사리넨, 리차드 누트라, 케빈 로쉬, 루이스 칸과 같은 유명한 미국 건축가들을 만났다. 이것은 그의 디자인 이념에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로 표시되었다. 그 영향과 함께 그는 더 ‘공정한’ 사회를 위한 독특한 건축 양식을 발견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을 발전시켰다. 이 두번째 단계에서 그는 새로운 건축 재료들에 경의를 표하고, 현장에서 모은 부품들로써 건물들을 바라보고, 액체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자연과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등 연습을 거쳐 이탈을 보였다. 세 번째 단계는 스리랑카와 같은 언제나 격동의 장소에서 불안정한 존재에 대한 그 만의 불안감뿐만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경외를 보였던 가톨릭교에서 독단적인 생각 모두를 강조하는 자연 복제의 높은 단계들과는 별도로, ‘해체’와 같은 글로벌한 철학 트렌드가 그의 작품에서 미묘한 징후들에 절정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