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탐욕의 기호와 성찰로서의 거푸집
★홍경한(미술평론가)
근육이 팽팽히 날선 몸체가 좌대 한 귀퉁이에 의지한 채 유토피아를 향해 놓여 있다. 살짝 쥔 주먹,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그의 노동자적 신체는 처절하게 말라 타들어가는 초라한 존재의 불안감을 선사하고,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심리와 욕망을 현재의 시선으로 그려 놓고 있다. 이는 김기엽 작가의 2004년 작품 <세상을 향하여>를 접했을 때의 인상이다.
10여 년이 더 흐른 오늘에도 그의 작품들은 현대문명 속에서의 불안한 인간의 위치, 그리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현대인의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자각-Ⅱ>(2016)에서처럼 몸뚱이조차 상실한 채 한 방향으로 얼굴을 기댄 인물과, 뼛속 깊이 각인된 비극적 인간 욕망의 끝을 뒤집어진 해골로 표현한 <정복자>(2016), 갈 곳 잃어 방황하는 위태로운 우리네 삶과 죽음의 문지방을 서성이는 동시대인의 초상을 상징하는 <경계>(2016) 등의 작품을 통해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불안하고 긴장된 자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차분하게 옮기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작업 간 차이라면 10여 년 전과는 달리 작가 자신이 알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심적 미감을 원만하게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며, 미적 언어가 숙달됨으로서 노골적이거나 자세한 주석을 주렁주렁 달지 않더라도 메시지 전달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해졌다는 사실이다. 15년 가까이 이어온 과거의 흙 작업을 건너 2012년 이후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현대조각으로의 변화도 눈에 띄지만, 특히 인간에 대한 성찰을 포함해 자연에 관심이 부쩍 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김기엽의 각사(刻史)에서 인간과 자연이라는 관계성에 대한 고민을 중심으로 현실을 응시하는 태도와 삶과 미래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는 특징은 작가의 오늘을 대리한다. 2013년 제작한 <회귀> 연작(뱀처럼 똬리 튼 형상의 작품이다.)에서처럼 순환하는 인간의 삶에서 배척할 수 없는 자연의 귀중함을 되묻는 주제의식 역시 같은 맥락을 이룬다.
헌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조형요소에 있어 흥미로운 건 그가 주로 사용하는 소재에 있다. 그는 목재(정확히는 밀착된 합판)로, 자연주의적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목을 넓고 얇게 깎은 단판(veneer)을 각 단판의 섬유방향이 서로 직교되도록 겹쳐 접착 제조한 판상 목질의 재료인 이 합판은 건축물 내장재나 단순한 용도에 주로 사용하는 재료이나, 작가는 이를 썩 훌륭한 조형매제로 활용한다. 이는 자연에 내재된 의미를 통해 근원적인 것과 변화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려 함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며, 그 간극 사이에는 자연에서 온 것들을 통해, 우리 모두는 ‘자연에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작가만의 의도가 실려 있다.
실제로 그는 자연에게 부채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는 자연에 감사해야 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때문에 김기엽 작가의 화두는 언제나 ‘자연’과 ‘인간’, ‘자연 속의 인간’이다. 물론 김기엽이 선택한 접착합판 역시 단지 가공된 나무 판재들이 아니라 가공되는 과정을 통한 자연의 소환과 지시성을 의미하며,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자적 관점을 불러오는 촉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때 그의 합판은 인간이 지닌 ‘탐욕’을 드러내는 기호이자, 성찰을 담아내는 거푸집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가치관 혹은 예술관이 곧 작품으로 생성됨을 상기할 때 “자연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착취와 탐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은 김기엽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일례로 그의 2014년도 작품
또 하나의 작품 <네 개의 시선>(2015) 역시 같은 범주에 든다. 기다란 일체형 원통형 몸체에 사면상(四面像)이 새겨진 이 작품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작업으로 꼽힌다. 자연을 배척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 아래, 인간의 허황된 욕심과 욕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다소 계몽적인 메시지가 투영되어 있는 <네 개의 시선>은, 착취되는 자연 내에서 발아되고 생명을 얻는 인간을 귀납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해도 무리는 없다.
이 밖에도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을 비판하고 성찰을 강조하고 있는
그러고 보면 김기엽의 작품들은 투사된 인간-자리 바꾸기-역할 바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대상의 전치를 통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등식을 새롭게 위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근작들 역시 여전히 인간과 자연에 천착하고 있다. 여기에는 작가가 바라보는 현대인의 그릇된 탐욕과 욕망이 포박되어 있으며, 살아 숨 쉬는 생명과 생성, 순환, 회귀라는 명사가 녹아 있다. 때문에 우린 그의 작품으로 인해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그 의미를 재음미할 수 있고 인간 환경에 내재된 무형의 언어를 통해 존재의 근원적인 것과 변화하는 것, 그 사이에서의 자연의 가치를 체감할 수 있다.
조형적으로도 그의 작품은 조각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구성요소가 다분히 배어 있다. 모르긴 해도 조형요소와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작품은 나올 수가 없었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는 간결한 형태가 있으며 작품과 표상의 본질을 옹립시키는 호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기엽의 작품에는 나무의 질량을 넘어선 밀도가 배어 있다. 매스(mass)와 표현이 적절하게 조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매스의 외곽선에는 공간의 전 단계인 면과 기운, 에너지가 상주하고 있다.
이 중에서 형태는 공간 속에서 부피를 지닌 덩어리로서 몇 가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일단 그가 만들어내는 형태는 외부 형태와 내부형태, < love>(2015)에서처럼 동적인 양의 형태와 <두 개의 기둥>에서 알 수 있듯 금이 가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내뿜는 음의 형태가 있다. 또한 신발 한 켤레를 묘사한 <경계>에서 인지 가능하듯 충분히 사실적인 형태, < MAN> 연작에서 부분적으로 취해온 추상적인 형태 등이 골고루 융합되어 있다. 이는 마치 한국화의 여백과 비교할 수 있는데, 한국화에서의 여백이 추상적인 공간이라면 김기엽의 조각에서의 공간은 실제적이며, 그의 작품 자체와 분리 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가 오랜 시간 유지해온 주제의식이다. 이것이 어째서 유의미하냐면, 의식 자체는 이미 행동을 구성하며 일정한 진로를 결정하는 행동방식이 된다는 점, 독일의 철학자 훗설(Husserl)의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는 말처럼 ‘의식의 상태’가 아니라 ‘상태의 의식’이 가시화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의식의 상태’가 의식의 위상기능(지각(知覺), 느낌, 감동(感動) 등)이라면, ‘상태의 의식’은 어떤 작용 능력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갖는 지향의식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태에 수미일관해온 김기엽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가치를 획득한다 해도 그르지 않다. 세월의 테와 함께 상태의식을 거듭함으로서 의식의 위상기능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